꿈꾸는 의대생의 그림일기 <디지티, 의학에 반하다>의 저자 연세의대 황지민 씨

‘바쁘다’, ‘공부량이 많다’. 의대생 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실제 의대생들은 고3 시절을 지나왔지만, 여전히 그때 만큼 공부한다는 이유로 의대 생활을 ‘고4’라고 부른다. 전공기초과목과 교양과목을 배우는 예과도 아닌 본과의 경우라면 특히나 더하다.

하지만 여기 웹툰을 연재하며 만화책을 내고, 최근 작가로의 데뷔도 성공적으로 이뤄낸 의대생이 있다. 연세의대 본과 3학년에 재학 중인 황지민씨다.

답답하리라 생각했던 본과 생활에서 뜻밖의 설렘과 재미를 발견했고 이를 남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황지민씨는 최근 의대 생활과 의학 상식을 직접 그려 담은 <디지티, 의학에 반하다>라는 만화책을 냈다.

최근 청년의사 인기만화 ‘쇼피알’의 작가로 데뷔하기도 했다.

디지티는 황지민씨의 별명으로, 아기자기한 그림 만큼이나 귀여운 외모를 가진 황씨는 의학 상식을 귀여운 그림으로 그려내 독자들로 하여금 의대생의 필기 노트를 훔쳐보는 느낌을 받게 했다.

라틴어로는 손가락, ‘디지티 지미니’

“디지티는 라틴어로 손가락이라는 뜻을 가진 제 별명이예요. 별명이 생긴 건 의과대학 1학년 때 한 해부실습 때예요. 이때 몸속의 많은 구조물들의 라틴어 이름을 배워요. 새끼손가락의 경우 라틴어로 ‘디지티 미니미’예요. 친구들과 모여 용어를 외우다 한 친구가 ‘디지티 미니미? 넌 그럼 디지티 지미니 하면 되겠다’라고 한 우스갯소리가 굳어져 제 별명이 됐어요.”

황 씨의 그림은 교과서 구석에 그린 낙서에서 시작됐다. 그에게 그림은 공부의 연장이었다.

“교과서 구석에 수업과 관련된 그림을 조금씩 그려왔어요. 그러다 친구들끼리 돌려보는 필기 노트에 이해를 돕기 위해 삽화를 그려 넣었더니 반응이 좋았어요. 처음에는 동그라미나 세모 등을 이용해 간단하게 그리다가 차차 장기나 세포 등에 눈, 코, 입을 달아 의인화하는 식으로 발전했죠. 이때는 신이 나서 그림을 그려댔어요.”

그림이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줬다고.

“사실 의대생들끼리는 의대생활을 ‘고4’라고 부를 만큼 공부할 것이 많아요. 그림 그릴 시간을 내기 위해 공부는 최대한 수업시간에 다 소화할 수 있도록 집중했어요. 공부하다 집중이 안 될 때, 스트레스받을 때 그림을 그렸어요. 그림은 제 의대 생활에 탈출구가 돼줬어요”

황 씨는 의학 상식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 징그럽게 느낄 수 있는 장기와 세포에 눈과 입을 그려 넣어 의인화 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몸속 세계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고.

연세의대 도서관에서 만난 황지민씨는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의대생의 삶과 몸 이야기를 담은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하나둘 페이스북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도 만났다. 황 씨는 이들과 함께 ‘의심 많은 작가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의대 생활툰(의대 생활 소재 웹툰)’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재 시작 3개월 만에 그의 만화가 출판사 눈에 들었다.

“본격적으로 태블릿도 사고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그림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한 작가님께서 ‘의심 많은 작가들’이라는 페이지에서 같이 의대 생활툰을 연재하자고 권해주셨어요. 여기서는 학교생활에 대한 감상을 ‘두 개의 시선’이라는 코너를 통해 그려냈어요. 그러다 보니 몇 차례 언론에 알려지기도 했고 그걸 보고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권유를 해주셨어요. 본과 2학년을 마치자마자 방학 동안 단행본 <디지티, 의학에 반하다>를 만들었어요.”

페이스북에 그림을 올리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주어진 큰 기회에 떨리기도 했지만, 황 씨는 사람들에게 의대 생활을 알리고 싶어 출판을 결심했다.

“의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나 책은 많지만 의대생의 이야기를 다룬 것은 많이 없어요. 그래서인지 의대생들의 삶을 흔히 바쁘고 시간이 없고, 딱딱하고 공부만 할 것 같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의대 안에서도 많은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의대생이 되고 싶은 사람, 의대생 자녀를 둔 부모님, 의대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옵세’와 ‘마구리’를 아시나요?

‘옵세’와 ‘마구리’는 책 속에 담긴 의대생들이 쓰는 특이한 단어다. 옵세는 ‘강박적인’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Obsessive를 따 만든 말로 ‘성적에 집착하는 학생’을 부르는 말이다. 마구리의 경우 ‘막 굴러다니는’ 성적관리를 하지 않는 학생을 칭하는 말이다. 이처럼 책에서는 의대생들이 쓰는 용어를 비롯한 그들의 진짜 삶을 엿볼 수 있다.

“의대 생활을 하면서 ‘재미있다, 웃기다’라고 생각한 부분을 위주로 담았어요. 소소한 이야기지만 의대생들은 이를 보고 공감할 수 있고, 의대생이 아닌 이들이 본다면 ‘의대생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요. 또 동료 의대생들과 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기도 했어요. ‘지금은 미숙하고 서툴러 끝없는 지식과 나의 무지에 조바심이 날 때도 있지만, 언젠가 우리 모두 익숙해질 거야‘와 같은 메시지가 바로 그런 것이에요.”

우리 몸속 이야기도 배울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장기들은 저마다 눈, 코, 입, 손발을 달고 있다. 면역세포를 다룬 장에서는 경찰모와 경찰봉을 든 백혈구가 등장하며, 산소 조직을 나르는 일을 하는 적혈구는 책 속에서 산소를 꼭 안고 있다.

황지민 씨가 그린 '복강 속의 로맨스'

“장기와 세포를 의인화하게 된 계기는 실제로 배울 때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에요. 이 모티브가 된 것은 ‘복강 속의 로맨스’(사진)구요. 교수님이 강의하시면서 ‘십이지장과 이자는 꼭 안고 있다. 그래서 복강 속의 로맨스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상상이 돼서, 그려봤어요.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몸속 장기들의 상호작용이나 현상을 들으면 그 모습이 딱하고 연상 돼요. 그림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를 크게 보여주고 자세한 설명을 글로 해주면 이해가 쉬워요.”

차기작은 본과 3, 4학년의 삶

독자들로부터 받은 피드백 중 가장 기뻤던 말이 ‘현웃(현실 웃음이라는 뜻을 가진 은어) 터졌다’라는 말이란다. 개그 욕심(?) 충만한 황씨는 현재 쇼피알 작가로 활동하며, 이후에는 본과 3학년, 4학년의 이야기를 담은 책 출판을 계획하고 있다.

“같은 본과라도 1·2학년과 3·4학년의 생활은 또 달라요. 1·2학년의 생활은 계속 교실에서 수업 받고 시험 치는 식으로 이뤄지고 3·4학년은 직접 병원에서 환자도 청진해보고 교수님들의 진료를 견학하죠. 지금은 바빠 그림을 그릴 수 없지만 한 과 실습이 끝날 때마다 느낀 점을 글로 남겨두고 있어요.”

만화가가 아닌 스토리 작가로도 데뷔했다는 황씨. 그는 청년의사 인기 만화인 '쇼피알' 작가로도 데뷔, 최근까지 6편의 스토리를 썼다.

“단국의대 기생충학교실 서민 교수님의 추천으로 쇼피알 작가에 도전하게 됐어요. 그림이 아닌 글만 가지고 내용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어요. 귀여운 그림체 대신 통통 튀는 내용, 대사, 문구 스토리로만 표현해야 해서 고민을 많죠. 분량도 평상시에 그리던 만화에 비해 16컷으로 긴 편이에요. 하지만 쇼피알 작가를 하면서 스토리를 구성하는 훈련이 됐어요. 생활을 그린 제 만화와 다르게 상상력을 요구하는 부분도 있어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앞으로도 쇼피알 작가로 활동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이런 일탈(?)을 이어가겠다는 그는 의대생들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본과 생활을 하기 전에는 공부만 해야 할 것 같고 새로운 것을 시작해 보겠다는 엄두를 못 낼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취미가 메마르게 느껴지는 의대 생활에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어요. 시작은 어렵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조금씩 해낼 수 있어요. 망설이는 의대생들에게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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