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바쁜 시간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형님, 저 준희유! 서천 준희유! 한 사람 아주 딱혀유. 불쌍한 사람 모시고 서울서 내려간께 오늘 수술 좀 잘 혀주슈! 꼭 오늘밤 늦게라도 해주슈잉!”준희 씨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씩씩하게 들렸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1998년 나는 충남 서천군 기산면에 공중보건의사로 발령받았다. 기산면은 서천읍과 한산면 사이에 있는 작은 면으로 중심에는 면사무소와 초등학교, 파출소, 우체국, 농협수퍼와 소방서가 150미터 반경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말뫼다방도 그중 하나였다. 점심시간이
“여보세요.”“네 김용식 씨 누나 되시죠?”“…네. 맞습니다.”낯선 지역번호로 걸려 온 전화 너머로 흘러나온 ‘김용식’ 과 ‘누나’라는 두 단어의 조합은, 이질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용케도 내 번호를 외워가 비상연락망에 적어 둔 그 녀석이 기특했다.“OO 구치소에서 전화드렸습니다. 김용식 씨 금일 재판에서 실형 선고되어 법정구속 후 OO 구치소로 이감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아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그래도 아니길 바랐었는데. 엊그제 병원에서 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하니, 밀려오는 허탈감은
물에 물감을 떨어뜨려 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알고 계실 거예요. 단 한 방울의 물감만으로도 한 컵의 물을 온통 물들일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소개할 환자분께서 저에게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저는 대학병원에서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주니어 스텝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 저는, 스스로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게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대학병원 진료는 3분 진료가 기본입니다. 한 세션에 50-60명씩 환자분들을 진료하고 있으면, 환자에 대한
진료실이 벌컥 열리며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들어왔다. 아기 엄마는 울고 있었고 아기 아빠는 아기를 아기띠에 매고 들어왔는데 두 사람 다 잠옷에 가까운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아기가 향수를 먹은 것 같아요.”엄마가 울면서 떨리는 손으로 내민 것은 엄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샘플 향수병이었다. 연한 핑크색의 향수가 가득 들어 찰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곧장 아빠 품의 아기를 쳐다봤다. 막 10개월이 된 여자 아기는 별을 빼다 박은 듯 반짝이는 눈으로 내 목에 걸린 연두색 청진기만 쳐다보고 있었다.향수병의 뚜껑을 열어보니 상큼한 꽃향기가
원무과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양손에 짐을 들고 아내와 큰 길로 나섰다. 아내가 짐을 달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뭘.”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은 쿵쾅거렸다. 택시를 탔다. 아내와 나는 말없이 창문만 바라봤다.“멀리 가 주셔서 감사합니다.”기사는 백미러를 보면서 웃는다. 택시는 곧 성수대교를 올라타고 있었다.지금으로부터 5년 전, 나는 고혈압에 의한 만성신부전으로 진단을 받았다. 출근 중에 갑자기 숨이 차고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았다. 며칠 후 병원에 입원을 했고 만성신부전으로 진단을 받았다. 그 후 5
“네에? 제가 폐경이요? “미경씨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미간과 이마에 슬픔이 깊이 패였다. 마스크에 갇혀 있던 세월의 흔적이, 그 어여쁜 얼굴에 일시에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40대 후반이라기엔 너무 어려 보였던 그녀는 갑자기 노파 같았다. 그리곤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내 진료실의 일상 시간을 멈춰버렸다.폐경은 더이상 생리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제 임신을 할 수 없고, 여성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아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증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식은땀과 수면장애, 감정기복 등의 전형적인 증상 이외에도 골다공증, 심혈관 질환
나는 어린 시절 한 번도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다. 나는 늘 도심 한복판 속 아파트에 살았다. 아파트 주변을 기웃대는 길고양이들을 간혹 마주쳤지만, 엄마가 더럽다고 근처에도 못 가게 하셨다. 엄마 말씀만 믿고, 위험한 생명체인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자란 내가 의대를 다니고, 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내과 전문의가 되기까지 고양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환자에 관심을 두기에도 늘 바빴고, 주변에 고양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내가 심각한 고양이 애호가인 남편을 만나고 나서, 나이 서른 중반 이후에 비로소 고양
수술 환자 대기실에 들어서려는데 뭔가 어수선한 기운이다. 타임아웃(환자 신원, 수술명, 수술 부위 등의 확인)을 하라고 나를 불렀던 간호사가 찡그린 얼굴로 입구에서 슬며시 내 옷깃을 잡는다.“교수님, 환자가 대성통곡하고 있어요.”정말 그랬다. 갑상선암 수술을 앞둔 내 환자는 대기실에서 명패를 찾지 않아도 알아볼 만큼 크게 울고 있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바라보고 있는데, 옆자리 할머니 환자와 맞은편 중학생 환자도 이내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이기 시작한다.‘아, 곤란하다.'마취과 전공의와 젊은 외
호스피스병원은 치유가능성이 없고 증상이나 기능적 장애로 가정에서 돌볼 수 없는 말기암 환자들을 임종 시까지 치료해 주고 고통을 완화해 줌으로써 남아있는 시간을 보다 의미 있게 보내다 편안하게 임종할 수 있도록 돌봄을 제공하는 곳이다. 이런 도움은 비단 환자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려움을 함께 견디며 감당하고 있는 가족들에게도 같은 맥락에서 유사하게 주어진다. 질병의 치유를 통한 건강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병원과는 달리 호스피스병원의 환자와 보호자들의 대부분은 오랫동안 많은 검사와 힘든 치료과정을 거쳐 오면서 이미 많이 지쳐 있던
때론 의사라는 직업이 어떤 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전생에 우린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김신 마냥 칼에 수많은 피를 묻힌 장수가 아니었을까.태생이 감정적인 인간이라, 환자의 죽음을 맞이할 때 나는 너무나도 괴롭다. 벌써 15년은 된 일이지만, 인턴 때 첫 코드 블루가 떠서 달려가던 기억이 난다. 그 뛰어갈 때 처음에는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의사가 된 것 같은 마음에 신이 나서 달려간다. 그게 정말 신이 난다기보다는 우리가 언제 또 이렇게 전속력으로 병원 내를 뛰어가겠나. 그러나 그렇게 CPR을 할 때면 그때의
우리는 흔히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마디의 말은 천금과도 같다" 라는 표현을 한다. 이러한 천금과 같은 말은 어느 때 가장 적합한 말일까? 물론 사람마다 각자의 위치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생과 사의 기로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주치의의 한마디가 그렇지 않을까 싶다. 요즈음은 전공의 특별법으로 전공의 생활에도 약간의 여유가 생겼지만. 14년 전 전공의 1년 차의 생활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꽤나 힘든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만큼, 환자나 보호자를 대할 때에도 온화한 말투로 대하기란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남자는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도 남자의 키는 130센티미터가 겨우 될까 말까였다. 실은 키를 제대로 잴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남자의 왼쪽 다리는 무릎 아래에서 끊어져 있었고, 남아 있는 오른쪽 다리는 뒤틀려 있었으며, 그 아래에 달린 오른발은 크기가 너무 작아 30킬로그램이 채 안 되는 남자의 몸무게조차 지탱할 수 없어 보였다. 누가 봐도 성인 남자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몸이었다. 하지만 내가 남자에게서 느꼈던 강한 이질감과 위화감의 근원은 남자의 끊어진 왼다리도, 뒤
이게 몇 년 만인가?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된 이후 처음으로 온 가족이 모인 추석날이었다. 그새 아이들은 하나 빼고 다 초등학생 고학년이 되어 자기네끼리 테이블을 차지하고 어른들만 따로 모여 앉았다.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보따리를 풀다 아버지가 지갑을 주섬주섬 만지시더니 ‘사전연명의료의향서등록증’을 꺼내시는 게 아닌가.“나랑 너네 엄마는 보건소 가서 이거 다 작성해 놨으니까, 혹시 나중에 잘못되면 절대 아무것도 하지 마라.”70세도 안되신 부모님이 예고 없이 말씀하시니 당황스러웠지만, 자식들이 병시중 고생할까 결정하신 것 같아
“환자분 시술 시작하겠습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마취할 때 조금 아프세요. 아픈 순간에는 제가 미리 말씀드릴게요.”케모포트 삽입을 위해 환자 오른쪽 가슴 윗부분을 마취했다. 시간 간격을 두고 마취가 되길 기다리던 중 환자가 갑자기 노래를 불렀다.“아름다운 이 강산을 지키는 우리 사나이 기백으로 오늘을 산다. 포탄의 불바다를 무릅쓰면서 고향 땅 부모형제 평화를 위해.”순간 눈이 동그래진 시술 방 간호사랑 눈이 마주쳤다. 공중보건의사로 군 복무를 마친 나는 훈련소를 4주 밖에 다녀오지 않았지만, 저 노래가 군가라는 것 쯤은